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장성축조 책임을 맡은 것은 營留王 25년으로 장성축조가 시작된지 11년 뒤이다. 앞의 《三國遺事》 기록은 연개소문과 천리장성의 축조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장성축조의 감독직무 자체가 부직의 계승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천리장성의
관계
양국간에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되던 우호관계는 고구려에서 淵蓋蘇文(연개소문)이 영류왕과 그 지지세력을 숙청한 뒤 寶臧王(보장왕)을 옹립하는 무단적 정변을 통해 집권함으로써 변화하였다.
연개소문은 권력집중이 가능한 莫離支(막리지)에 취임하여 軍國政事를 독단함으로써 당에 대
왕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정변 후 왕위에 오른 보장왕은 바로 연개소문이 3개월 전에 죽은 태양왕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연개소문이 태양왕과 연합하여 영류왕의 왕위를 위협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한 영류왕과 귀족들
연개소문 (淵蓋蘇文)
▲ 인물소개
15세에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대대로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다. 그 해에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을 몰아내고 영류왕을 죽였으며, 보장왕을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 뒤
관계가 점차 접근하여 갔을 뿐 아니라 고구려 내부적으로는 2,3차에 걸쳐 대규모적인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복잡한 정세를 띄고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에 영걸 연개소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연개소문이 어떠한 과정으로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였고, 당시 국제적으로 고구려가 어떠한 처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서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이 가능하여졌다.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가 바로 이러한 강력한 중앙집권력이 가장 강력한 때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왕권도 왕위계승 싸움과 대외 원정의 실패 등으로 점차 약화되어감에 따라 귀족연립정권이 출현 하게되었다.
왕과 민民의 관계 : 피정복지(지방)까지는 왕의 권력이 미치지 않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에는 피정복지의 민도 왕의 지배를 받는 민으로 파악됨으로써 수취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 왕의 민에 대한 직접지배
ⅱ. 대왕권의 확립과 전쟁의 성격 변화 : 이 시기의 전쟁은 귀족세력의 경제적
고구려, 백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당시 세속오계는 점차 신라 젊은이가 지켜야할 중요한 계율로 자리 잡았고, 삼한 통합의 정신으로 자라났다.
2) 김유신과의 관계
- 15세 풍월주 유신의 부제
- 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혼인
- 춘추의 딸 지조를 유신에게 시집보냄
- 즉위 후 유신을 상대
연개소문의 출생
- 홍무(弘武, 고구려 26대 영양왕의 연호) 14년 5월 10일에 출생 : <환단고기>에 기록,
신빙성은 없음. 즉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음.
-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사루봉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짐 : <강도지>에 기록
- 5부 중 동부 출신, 귀족 집안 - 당나라인이 주변 민족
연해주 일원까지, 남쪽은 한강유역에 이르는 지역을 통할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5˜6세기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는 매우 큰 것이었으며 고구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역동적이며 강인한 기상은 이 시기 대외관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후 7세기 후반 수당제국(隋唐帝國)과의 전쟁기에